[퍼옴] ……………….

[실화소설]엽기적인 겜녀 지금도 어딘가에서 쇠자를 닦고 있을 그녀에게 이 글을 바친다.

1. 첫만남

첫만남 아닌 첫만남 유난히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던 그해 겨울.
그러다 갑자기 엽기적으로 영하 10도가 넘는 날씨가 계속되던 그 어느날.
그녀를 알게 된 건 그 날이었다.

겨울 기분이 나는 건 좋은데, 욕이 튀어나올 정도로 춥던 날씨 덕분에,
내가 알바를 하던 겜방 화장실은 당연 꽁꽁 얼어 붙을 수 밖에.
그래서 물이 나오지 않는 화장실 문 앞에, 아래층 화장실을 이용하라는 종이를 붙여놓았다.

그렇게 표지문을 붙여놓고 화장실을 나오는데,
어떤 여자가 내 곁을 스쳐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라? 거침없이 들어가네? 에잇, 종이에 쓴 글을 보면 그냥 나오겠지.’

근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 여자는 바로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1분…. 손을 씻나?? 2분…. 전활 하나?? 3분… 4분…
그녀는 정확히 7분이 지나서야 화장실에서 나왔다.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그저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그 여자.
뭐, 설마 별 볼일(?)을 했을라구… 근데, 갑자기 같이 알바하는 동생이 뛰어오더니,

“형, 도대체 지금 누가 화장실 갔어?”

하고 화를 내는 것이다.

화장실 문을 열어보니, 아니, 콰과광~~ 아니, 우헉~ 헉스~ 우쒸~
갖은 감탄사가 튀어나올 수 없는 그 처절한 광경. 누가 똥색을 모를까봐,

그렇게 변기 가득히 선명한 똥색을 남기고 간 사람은
화장실 문앞에 붙여놓은 종이 쪼가리가 무색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난 그 여자 자리로 달려갔다.
씩씩대고 달려온 나를 그녀는 뚱한 표정으로 올려봤다

“아니, 화장실 앞에 있는 글 못 봤어요? 화장실 꼴 좀 보라구여!!!”

그러자, 그 여자의 황당한 대답.

“전, 화장실 안 갔는데여?”

헉스!!

“내가 봤어요. 방금 나오는 거!! 왜 시치미를 떼냐구여!!”

“전 아니에요. 전 여기 계속 있었어요.”

그리고는 그 여자는 다시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것이었다.

그 천연덕스러운 여자의 대꾸에 오히려 내가 할 말이 없어져서,
그냥 속으로만 숫자(욕)를 세며, 생수통에서 받아온 물로 화장실을 닦았다.

“세상에 뭐 저런 여자가 있냐? 진짜 웃긴다.”

동생 알바가 화를 냈지만, 그냥 나는,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하며
그냥 그 여자를 무시하기로 했다.
덕분에 그날, 주인 아저씨한테, 생수통 물이 갑자기 왜 많이 없어졌냐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우쒸, 다 그 뻔뻔한 여자 때문이야…. 젠장…. 평생 너를 저주하리라, 이 나쁜 여자야!!

그 일이 있고 난 후, 그 여자가 피씨 방에 들어와서, 돈을 내고 나갈 때까지
그 여자를 째려보는 일이 나의 일과가 되어
있었다.

2. About 그 여자

나쁜 뇬, 숫자 뇬부터 시작해서 변비나 걸려서 치질로 고생해라,
똥 싸다가 파편이나 잔뜩 튀어라 하는 주문까지
그 여자만 보면, 짜여진 무슨 극본처럼 줄줄 외워대곤 했던 것이다.

다행히 날씨가 풀려서 화장실에 물도 나오게 되고,
그 여자가 또 그런 더럽고도 불미스러운 사건을 벌일 수 없었는지,
다시 한 번 붙어보지는 못했지만, 생각날 때마다 이를 벅벅 갈아두고 있었다.

근데 생각해보니, 그 화장실 사건 때문에 그 여자를 자세히 보게 되었을 뿐이지,
사실은 그 이전부터 우리 겜방에 자주 오는 단골이지 뭔가.
그저 조용히 와서 저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다가 가곤 해서 신경을 안 썼을 뿐이지.

근데, 그 여자, 좀 이상한 구석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 똥 사건 이후로, 내가 그 여자를 조사한 결과를 보시라.

1- 그 여자는 일주일에 여섯번은 겜방에 올 정도로 단골이다.

근데, 겜방에 오는 시간이 일정하지가 않다.
나이를 보면 이십대 중반같아 직장인일 법한데,
겜방에 오는 시간은 점심 때쯤, 또는 밤 11시 넘어서였다.

또 어떨 때는 아침에 와서 밤까지 하루종일 앉아 있다가 가곤 했는데,
그게 규칙적인 것도 아니었다.

겜방비를 대려면 돈을 벌어야 할텐데, 직장을 다니는 건지 안 다니는 건지. 계속 그녀를 관찰하다가,
혹시 갑부집의 문제있는 딸이 아닐까..
하는 결론을 암묵적으로 동생알바와 내리기에 이르렀다.

2- 그 여자는 도대체, 그 많은 시간동안 자리에 앉아서 뭘 하는지 모르겠다.

너무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어서 괜히 근처에 갔다가는
엿본다는 의심을 살지 몰라 가보지는 못했지만,
써핑을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 흔한 롤플레잉게임을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언제 동생 알바가 슬쩍 지나가며 봤더니, 윈도우 프로그램 자체에 깔려있는 기본 게임인,
프리셀을 내리 세시간동안 하고 있었던 적도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생알바와 나는 그 여자가 갑부집의 자폐증있는 딸이 아닐까 하는
두번째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3- 평소에는 그냥 겜방에는 이러저러한 겜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그 여자가 있을 때, 가끔 무언가를 연속적으로 두들겨 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여자가 있을 법한 자리에서 울려오는 그 이상한 소리.
처음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 여자가 주로 앉는 자리의 키보드 스페이스 바가 고장나는 일이 두 세번 일어나고 나니,
정말 그 여자가 자리에서 뭘 하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주인 아저씨는 아저씨대로 키보드를 고장내는 손님 단속 안 한다고
알바인 우리는 욕만 잔뜩 먹어대고,그 여자는 아저씨 없을 때만 나타나,
그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으니,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게임 중에는 스페이스 바를 누르는 게임은 없었으니,
그 여자를 이해할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고,
또 키보드 좀 얌전히 써달라고 그 여자한테 얘기하면,
그 똥그란 눈으로 천연덕스럽게

“난 그런 적 없는데요.”

하고 말할까봐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동생 알바와 내가 내린 그 여자에 대한 세번째 결론은
갑부집의 딸이긴 한데, 자폐증에 수전증까지 있는 여자라는 것이었다.

4- 똥 사건 이전에는 그 여자를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여자는 아주 평범하게 생긴 여자였다.

그냥 염색도 안 한 검은 긴 머리에, 사실 갑부집딸 같지 않은 그저 그런 스타일의 옷을 입고 다녔다.
근데, 그 이후로 가만 살펴보니 이목구비가 잘 잡혀있는, 못생기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별로 말도 없고, 또 예의도 없는 것 같지는 않고 진지하고 조용하게 자리에 앉아있곤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한테, 그 여자를 가리키며 똥 사건을 얘기하면 설마 저 여자라 그랬을라구..
하면서, 오히려 내가 남을 모함하는 사람으로 매도되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동생 알바와 나는 그녀에 대한 네번째 결론이자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갑부집 딸이지만, 자폐증에, 수전증에, 정신분열에, 이중인격을 지닌, 그런 여자라고 말이다.

물론, 이와 같은 결론에는 그 여자를 밉게만 보려고 하는 나의 심사가 백분 반영된 것이긴 하다.
그런데, 미움도 관심이라고 하던가.
자꾸 그렇게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보니,
또 그 엽기적인 화장실 사건도 어느덧 잊혀질 시간이 지나다 보니,
어느 새 미움에서 시작한 관심이, 그녀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그녀가 보이면 안심이 되는,
그런 이상한 관심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3. About 나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 그 때쯤, 나는 거의 유령 같은 존재였다.
유령?? 혹시 내가 “디아더스” 영화에 나오는 귀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진 않겠지?
유령이란 건, 발을 담그고 있는 소속이란게 없단 거다.

대학 3학년 때 휴학을 하고 군에 갔다와서
복학을 할까 아님 다른 일을 할까 궁리하다
집 앞 피씨방에서 소일거리 삼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나의 신세…

하기야 밤 새워가며 피씨방을 지키는 생활이야말로
유령의 생체리듬과 다름이 없긴 하지만…

10시 이후면 노땅인 척 하고 앉아있는 미성년자 가려내랴,
겜비 외상으로 달아달라 애원하는 백수 떨쳐내랴,
담배연기로 꽉 찬 공기 환기하려고 문 열고 닫고 열고 닫고 열고 닫고 하랴,
주인아저씨가 한 가마니씩 퍼붓는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랴,
그렇게 내 생활은 피씨방에서 거의 썩듯이 하고 있었다.

어쨌건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살던 내게
그녀의 출현은 흑백의 내 생활에 한 줄기 칼라 같았고,
그러한 예민한 신경쓰임을 주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처음 시작은, 그녀에 대한 순수한 사랑 감정이 싹텄다기 보단,
아무 이상 없는 나의 피씨방 세상에 이상스런 모습으로 나타나
문득 나의 세계를 색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 분위기에 내가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이고,
또 그 이상스런 분위기에 신경을 쓰다가,
그 분위기를 일으킨 그녀에게 신경을 쓰다가,
그녀에게 호기심을 가지다가,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녀한테 꽂히면서,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루하루 그녀를 지켜보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문을 삐그덕 열고 들어오는 그녀를 보며… : 오차도 없이 11시군.
화장실에서 나오는 그녀를 보며…. : 음, 나온지 2분이 된 걸 보니, 큰일(?)을 성공못했군.
구석자리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는 그녀를 보며… : 지금 뭐하고 있을까…
그녀의 자리에서 담배연기가 뿜어나오는 걸 보며.. : 무슨 담배를 피고 있을까.
새벽 2시쯤 일어나 계산하는 그녀를 보며… : 오늘도 결국 한 마디도 안하는군.

이렇게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러니까 어떻게 좀더 그녀에 대해 알아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어떤 날이었다.
의외로 그녀에게서 먼저 신호가 왔다.

4. 캔커피 사건

그날도 다른 날처럼, 저녁 11시가 되자, 그 여자가 삐걱 문을 열며 피씨방으로 들어왔다.
구석진 자기만의 자리로 가서 가방을 내려놓더니, 자판기로 가서 캔커피를 뽑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가 아니라 두 개를 뽑는 것이 아닌가..
오늘은 밤샐일이 있나.. 싶었는데.
자리로 돌아간 그녀가 3분도 안 되서 내게 다가 오는 것이었다.
한 손엔 캔커피를 들고…

“이거… 제가 방금 딴 건데, 미리 따놓은 게 있는 줄 몰랐어요…다 못마실 것 같은데…드실래요..?”

아니, 이런 일이???

“아.. 예 고맙습니다….”

하고 얼결에 커피를 받았다. 이런, 이런 건 이 여자한테 안 어울리는 거 같아.
너무 정상적이잖아.
(아, 물론 그녀에게 특이한 걸 바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그녀스럽지 않았다.)

커피를 건네주고 돌아가는 그 여자의 그 검은 코트 자락을 보며
그래도 마음 한 켠으로는

“그래, 저런 무뚝뚝한 여자에게도 다정한 구석이 분명히 있었어…”

하는 따뜻함이 밀려들었다.
한 모금 들이켰을 때, 심장까지 찡~~다가오는 그 짜릿한 따뜻함.
혹시… 그녀도 날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갑자기 캔커피를 들고 있는 내 손이 미세한 떨림을 보이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나의 시선을 알아챈 것일까…??
갑자기 목이 타고..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다가온 사랑의 감정을 어떻게 수습해야하지?
난 다시 커피를 꿀꺽꿀꺽 마셨다………………???

??

???

근데, 물만 나와야 할 캔에서…
뭔가 찝찝한 건더기가 걸리는 것이었다….

????

?????

그건 다름 아닌




였다!!!!!!!

담.배.꽁.초.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원래 캔 안에 이게 들어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녀가 실수로 담배를 떨어놓고 모른 채 나를 준 걸까?
아니면, 그녀가 의도적으로 집어넣었단 말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난 몰래 그녀 옆 자리를 닦는 척 하고 그녀의 행동을 살펴보았다.

그녀가 피는 담배를 보니, 타임 맨솔!!
분명 내가 마신 캔 속에 있던 담배는 타임 맨솔이었는데!!
그럼 그건 분명 그녀의 의도적인 행동??
지난 화장실 사건에 대한 의도적인 보복이란 말인가??
난 황당해서 그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모니터에 집중하며 담배를 피우던 그녀가 갑자기 재를 자기가 마시던 캔에 떠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곧 담배꽁초를 넣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조금 있다가 그 커피를 마시려고 캔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잠깐만여!!!”

내 목소리에 그녀를 캔커피를 마시려다 말고 나를 바라보았다.

“거기에 꽁초 넣었잖아요!”

그러자 그녀는 캔커피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그제서야 캔커피 입구에 묻어있는 담뱃재를 확인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 누가 여기에 떨었지…??”

.
.
.
.
이렇게 해서 알게 되었다.
그녀는 무척 집중력이 뛰어난 여자라는 걸.

난 그녀에게, 아까 내게 준 커피에도 꽁초가 들어있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정말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실수였다고 말했다.
이렇게 단 몇마디 뿐이었지만,
이 일은 싸움이 아닌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게 된 시작이었다.

어쨌건 그 캔커피 사건 이후, 난 그녀에 대해 용기를 가져보기로 맘을 먹었다.
순수한 맘으로 커피를 주는 그 마음에 일단 감동.
그리고 솔직하게 미안해 할 줄 아는 그 순진함에 이단 감동.
그리고 집중력 강한 그 정신력에 삼단 감동.

그리하여, 미미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미미한 움직임으로 인하여,
드디어 난 그녀가 왜 피씨방에 오는지,
피씨방에서 무슨 게임을 하는지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지 알게 된 것이다.

5. 이상한 소리의 정체

그 날,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그녀 곁으로 다가가,
난 조용히 캔커피 하나를 내밀었다.

“저번에, 비록 꽁초가 빠져있긴 했지만여, 그래도 고마워서요… 이거 드세요.”

그녀를 스페이스바를 치다말며, 씩 웃었다.
그녀는 쑥스러워하며(!!!–쑥스러워하다니!!) 고맙다고 인사했다.
이 틈을 빌어 무슨 게임을 하나 모니터를 쳐다봤더니,
무슨 인형 같은 캐릭터들이 막 움직이는 게임이었던 것이다.
그 환하고 동화적인 분위기가 무겁고 어두운 그녀 이미지에는 안 맞는 게임이라고 할까?

“이게 뭐예요?”

“네…. 아바타 겜인데요, 티티엘 아시죠? 티티엘 핑고예요…….”

난 좀 더 친해질 셈으로

“어? 예쁜데,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하고 한발짝 더 다가섰다.
그러자 그녀, 대답없이,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가버리는 거였다.

아, 내가 좀 성급했었구나…
괜한 후회가 막 생겨 난 그냥 카운터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그래도 여기서 멈출 수 없지.
난 인터넷에서 티티엘과 핑고를 찾았다.
다운받아 겜 공간을 좀 돌아다녀보니, 대충 겜의 성격을 알만했다.

자기 맘대로 아바타를 꾸밀 수있는데,
핑나무에서 핑이라는 마법물질을 통해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그런 겜이었다.

근데!!!!

근데!!!!

바로 거기!!!!!!

핑나무에서 핑을 딸 때,
아바타가 과일요정으로 변하는데!!!
그 때, 과일요정이 핑나무를 향해 달려갈 때
스페이스바를 전력으로 두들겨대야 했던 것이다.

아, 그래!!!

그녀가 나타나면 피씨방을 울리던 그 키보드 소리가…
가끔 스페이스바가 고장나곤 하던 그 키보드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구나….
진지하고 염세적인 분위기의 그녀의 집중력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구나………

그날 이후,
그녀의 모든 것을 다 알아버린 것 같은 기분에 빠진 나는
핑고를 돌며 그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겜도 겜이지만, 그녀의 아바타라도 만나,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면…
하는 마음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 다음의 사건이 없었다면,
그렇게 그녀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나마
기쁘게 살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다시 시간을 앞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
그날… 그녀를 지킬 수가 있었을 텐데….

6. 쇠자 혹은 줄칼

그날.

그날.

그날을 운명적인 날이라고 부르고 싶다.

운명.

그래, 그렇게 부를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나의 과오를 씻을 수만 있다면!!!

그날도 밤 11시에 그녀는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런데, 다른날과는 달리 문을 열고 쓰윽 나타나 구석진 자신의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더니,
카운터 앞으로 다가왔다.
혹시 내가 그녀를 기웃거리는 걸 알고 따지러 오는 건 아닌가 싶어
겁이 덜컥 난 나는 고개를 돌리고 딴 일을 하는 척 했다.
그 때 약간은 쉰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휴지가 없네요…”

카운터에 항상 비치해 두었던 휴지가 떨어졌던 모양이었다.
안도의 한숨.
난 창고에서 휴지를 꺼내다 그녀 앞에다 내놓았다.
그녀는 약간의 휴지를 뜯어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그녀가 코트 주머니 속에서 꺼낸 물건!!
그것은 20센티 가량의 폭이 좁은 쇠자였던 것이다!!!!

쇠자!!!!
아니, 정확하게 확인하지 못했지만,
톱니가 달려있는 줄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줄칼!!!!!
암튼 쇠자인지 줄칼인지 모를, 그 물건을
휴지로 얌전히 닦아낸 그녀는, 휴지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후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겜방에서 쇠자??
아니, 도대체 그녀는 그 구석진 자리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난 의문과 두려움으로 떨기 시작했다.

컴퓨터의 전선들을 끊어버릴 심산인가??
본체를 뜯어내어 섬세한 부품들의 심장을 파헤칠 것인가?
만약 그럴 경우, 주인 아저씨에게 꼼짝없이
그 책임을 내가 물어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처음엔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그런데, 문득 든 생각,
줄칼의 대상이 컴퓨터가 아니라, 바로 그녀 자신이라면?
어두침침한 게임방 구석, 아마도 신경을 쓰지 않는 그 구석 자리에서
그녀는 혹시 자신의 손목을 그어버리려는 것은 아닐까?
삶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품고 있지 않는 듯한,
쉬이 늙어버린 듯한 마음을 지닌 그녀는
이대로 이렇게 지난한 삶을 마감하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에게로 와서 휴지를 찾은 것은,
혹시 나에게 구해달라고 구원의 손길을 무의식 중에 뻗은 건 아니었을까??
이에 생각이 미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돼!! 안돼!! 그녀를 살려야해!!

난 미친듯이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그녀의 구석 자리,
자기가 무덤으로 만들려고 했던 그 자리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만둬요!!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7. 줄칼 혹은 쇠자

나의 고함소리에 피씨방 손님들까지 깜짝 놀라 웅성거리며
그녀의 자리 주변에 몰려들었다.
흥분과 긴장으로 얼굴이 벌개진 나는
그녀의 웅크린 어깨를 정신없이 낚아챘다.

그 때….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그녀의 눈길…

그 때….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입을 틀어막던 사람들의 표정….

그 때…
그녀의 손에 쥐어있던…
쇠자..
줄칼이 아닌 쇠자…

그 때…
그녀는
스페이스 바를 더 빨리 연타하기 위해
핑나무에 더 빨리 달려가기 위해
스페이스 바를 치느라 지친 팔을 쉬기 위해
스페이스 바에 쇠자를 대고

열심히

열심히

..
.
.
.
튕기고 있던 중이었다.

그날 피씨방에서 일으킨 소동 아닌 소동 이후,
그녀는 나를 쏘아보며 피씨방을 나가버렸고

다시는

다시는
이 곳에 찾아오지 않았다.

피씨방을 들르는 단골 손님들은
내게 가끔 그 일을 이야기하며
참 황당한 일도 다 있다며 웃곤 했다.

나도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내가 희망을 가질 수도 있었던 한 여자를
잃어버렸다는
쓴 상실감의 허탈한 웃음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다시 이곳을 찾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진 그 날 이후
난 핑고를 열심히 헤매 다녔다.

하지만, 누가 과연 그녀인가……??
그녀를 찾을 수가 있을까….

지금도 그녀는 어딘가에서 쇠자를 닦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그녀…를 찾게 된다면.
꼭 나에게 연락을 주길 바란다.

내 서랍 속에 핑고를 묻기전에….

— THE END —

대화에 참여

댓글 9개

  1. 푸하하~ 와~ 와~ 와~
    무지 웃김~
    업무땜에 스트레스 받구 있었는데,
    덕님 덕분에 열라 웃었네요~
    감사~ㅎㅎ

  2. 6일 놀게 해준다구 사장 뼛속까지 우려먹을려고 작정한듯~ -_-

    아얄씨 쳇 할 새도 없어요~ – _-

    그리고 사장이 자주 로밍을 함~ 머가 이리 할게 많은지~~ – _-

    젝1

  3. 아.. 아비터 뽑아서. 위에 올려 놓으세요…
    아님 디파일러 뽑아서…
    사장님 오심… 연기를 뿜던가… ㅡ.ㅡ;;;;;;;;;

    아. 근데 글 길긴 한데 잼잇음… 덕님 샷~~!!

  4. 압쥐 – -;이거 내얘기 아니우 –^?
    무지 공감이 가네 –;나두 울동네 피씨방알바한테
    잘해조야지 –; 음음..

  5. 수님 꼴초 였음 – _-?

    자 튕기는건 충분히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되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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