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논단] 나르시시즘의 한국사회
어느 작가가 친구를 만나 오랫동안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너무 내 얘기만 했군. 이젠 자네 얘기 좀 하세. 자넨 이번에 나온 내 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에리히 프롬의 시대에 널리 알려졌던 농담이라고 한다.
모든 인간은 태내에 있을 때부터 본질적으로 나르시시스트이며 그 성향은 일생을 거쳐 지속된다고 한다. 다만 그것이 상황에 따라 건강하거나 건강하지 못한 성향을 띨 수도 있다는 게 정신분석학계의 일반적 의견이다.
소풍길에 사진을 찍어 나중에 동행자들에게 나누어 주면 자기 사진을 들여다보며 대체로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는다.
타인으로부터 비판 받거나 객관적 평가를 들을 때면 누구나 불편한 심사를 느낀다.
외모에 대해, 자아에 대해, 운명에 대해 실제보다 부풀리고 미화된 자기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깥으로부터 규정되는 자신의 모습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 역시 나르시시즘의 한 얼굴이다.
‘나르시시즘’은 자기 도취, 자기애 등으로 번역되다가 요즈음은 ‘자기애’로 더 많이 쓰이며 정상적 자기애, 병리적 자기애로 나누어 말한다.
미국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라시는 1970년대 미국 문화를 기본적으로 ‘나르시시즘의 문화’라고 정의했다. 영국의 권위주의에 대항하는 미국의 개인주의 문화가 발전하여 ‘나르시시즘 문화’라고 규정할 만한 현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유명인에 대한 숭배, 자수성가한 개인의 신화화, 스포츠의 흥행 산업화, 정치의 스펙터클화 등의 현상을 나타내고 개인적으로는 명성에 대한 매혹, 오락 정신의 퇴조, 남녀 관계의 악화, 노화에 대한 공포 등의 행태를 보인다고 한다.
사람들은 건강식품을 섭취하고, 요가나 춤을 배우고, 타인과 관계 맺는 기술을 배우며, 쾌락의 공포를 극복하고자 하는 일들로 일상을 메워 나간다는 것이다.
1970년대 미국 이야기는 오늘의 한국 사회와 면밀하게 겹쳐 보인다.
얼짱, 몸짱 같은 몸 숭배의 나르시시즘도 있고, 카메라폰이나 디지털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일상의 나르시시즘도 보인다. 느닷없이 불어닥친 웰빙 열풍은 고도로 세련된 나르시시즘이 아닌가 싶다.
월드컵 때는 과도한 응원 열풍 배면에서 집단적 나르시시즘의 그림자가 보이더니, 지난 총선 때 각 정당 대표와 그 추종자들의 모습에서도 나르시시즘의 옆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라시에 의하면 현대 사회는 이중의 의미로 나르시시즘적이라 한다.
나르시시즘적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 특별한 위치에 올라 사회적으로 뚜렷한 역할을 하며, 또한 그 관료들에게 의존적이 되도록 보통 사람들의 나르시시즘적인 특질을 유도하고 강화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지구촌 뉴스를 접하면 70년대 이후에도 미국의 나르시시즘 문화는 계속 팽창하여 병리적 자기애에까지 이른 듯 보인다.
“‘우리’는 훌륭하고 ‘그들’은 보잘 것 없다. ‘우리’는 선하고 ‘그들’은 악하다. ‘우리’에 대한 비판은 사악하고 참을 수 없는 공격이지만 ‘그들’에게 하는 비판은 그들을 진리로 이끄는 선의의 노력이다.”(에리히 프롬, ‘인간의 마음’중에서).
미국의 오늘에서 우리의 미래를 보는 듯한 불길함을 느끼고 싶지는 않다.
우리 사회의 각 집단이 저마다 정의와 명분을 내세우며 갈등하고 대립하는 그 틈바구니에서 사회를 추진시키는 힘이 나오고 권력이 균형을 잡아간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한편으로 염려스러운 것은 나르시시즘이 가지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자폐적 속성에 대해서이다.
인류는 인간만이 특별하고 위대하다는 나르시시즘을 깨며 발전해 왔다.
코페르니쿠스, 다윈, 프로이트의 발견이 그렇다. 한 개인이나 사회가 성숙한다는 것 역시 나르시시즘을 극복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자기만 바라보다가 호수에 빠져 죽은 나르시스의 신화는 나르시시즘 끝에는 자멸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김형경 소설가)
4월 18일 조선일보에서 펌 —————————————————————–
이게 무슨 가볍게 읽어볼만한글임? 글자개수만해도엄청나구만
와 사과언뉘 욕감하심..
나도 그말쓰려다가 보복이 두려워서 –;;
ㅡ_______ㅡ;
다옥 자게 보고 이거 보면 큰 공감이 생긴다는 -_-
이글 너무 무거어 -,.-;;